회사 일이 이제 별로 안 걸린다면 — 편해진 게 아니라 안 들리게 된 겁니다

회사 일이 이제 별로 안 걸린다면 — 편해진 게 아니라 안 들리게 된 겁니다

상사 때문에 힘들다는 영상에 이런 댓글이 제일 위로 올라와 있었습니다. 천백 명 넘게 공감을 눌렀고요.

"사회생활 12년, 혼내지도 않고 혼나지도 않습니다. 데여도 보고 상처도 받아보고… 이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모니터만 보다 집에 갑니다. 직장에서 감정 소모하지 않습니다."

이 댓글을 두고 냉소적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데였다고 하셨잖아요. 여러 번 데인 다음에 고른 방법입니다. 감정을 안 쓰기로 한 건 무너진 게 아니라 오래 버틴 사람의 방식이고요.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말했다가 괜히 분위기만 나빠진 적이 있고, 나서서 챙겼다가 혼자 뒤집어쓴 적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게 몇 번 쌓이면 말을 안 하게 되고,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아예 안 걸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감정은 원래 신호였습니다

사람한테서 감정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회사에서만 안 쓰기로 한 거니까요. 그래서 이건 성격이 바뀐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회사에서 올라오던 그 감정이 사실은 신호였다는 겁니다. "어 이건 좀 아닌데" 하는 거요. 그게 올라와야 뭘 바꿀지도 보이고, 여기 더 있을지 말지도 보입니다.

그게 꺼지면 회사가 편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전엔 그렇게 짜증 나던 게 지금은 그냥 넘어가지니까요. 그런데 편해진 게 아니라 안 들리게 된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신호가 안 들리는 동안에도 상황은 그대로 굴러가기 때문입니다. 바꿀 수 있었던 것도 그냥 지나가고, 나가야 할 시점도 지나갑니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나 있는 거죠.

무뎌지는 건 버티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신호입니다

이 상태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번아웃을 오래 연구한 크리스티나 매슬랙과 마이클 라이터가 2016년 『World Psychiatry』에 정리한 번아웃의 세 축을 보면, 소진과 효능감 저하와 나란히 냉소가 들어 있습니다. 일에서도 사람에게서도 한 발 물러나 무심해지는 상태요.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게 하나 있습니다. 냉소를 게으름이나 태도 문제로 읽는 겁니다. 실제로는 반대에 가깝습니다. 계속 신경 쓰다가는 못 버티겠어서 거리를 둔 것이고, 그건 그 상황에서 꽤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다만 이 방식에는 값이 있습니다. 거리를 두면 안 아픈 대신 안 보입니다. 그리고 안 보이면 판단을 못 합니다.

그래서 고치지 말고 적어만 둡니다

여기서 "다시 감정을 쓰세요"라고 말하는 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렇게 되지도 않고요. 대신 확인만 해보시면 됩니다.

이번 주에 "어 이건 좀 아닌데" 싶었던 것 하나를 메모에 적어두세요. 고치라는 게 아니라 적어만 두는 겁니다.

적는 법은 최대한 간단해야 오래 갑니다.

이렇게만 적습니다 예시
날짜 + 무슨 일이 있었나 한 줄 9/3 회의에서 내 안건이 설명 없이 빠짐
그때 뭐가 걸렸는지 단어 하나 무시당한 느낌

여기서 중요한 건 해석을 안 적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내가 예민한가, 팀장이 어떤 사람인가는 적지 마세요. 적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려버리고, 결론이 나면 다음 주에 또 안 적게 됩니다.

한 달 뒤에 그 메모가 알려주는 것

한 달쯤 지나 그 메모를 열어보시면 둘 중 하나입니다.

쌓여 있으면 아직 신경이 살아 있는 겁니다.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말을 안 하고 있었을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반복해서 올라온 항목이 하나쯤 있을 텐데, 그게 지금 이 자리에서 제일 크게 막혀 있는 것입니다. 바꿀 수 있는 건 대개 그 하나입니다.

비어 있으면 회사가 편해진 게 아니라 내가 안 듣기로 한 겁니다. 그렇다고 당장 나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 상태로 몇 년을 더 보내면, 나중에 다른 자리를 볼 때 내가 뭘 원하는지 말할 재료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 걸린 시간에서는 정보가 안 나오거든요.

한 달을 못 기다리시겠으면 2주만 해보셔도 됩니다. 판정이 목적이 아니라 눈금을 만드는 게 목적이니까요.

그럼 다시 예민해지라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감정 소모를 줄이는 전략 자체는 유효합니다. 특히 바꿀 수 없는 사람이 상대일 때는 거리를 두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인 경우도 많습니다.

구분은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 표현을 줄이는 것은 전략입니다. 말할 자리와 안 할 자리를 고르는 거니까요.
  • 느끼는 것 자체가 안 되는 것은 신호입니다. 고를 게 없어진 상태거든요.

앞엣것은 유지하셔도 됩니다. 뒤엣것이면 그때부터 눈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앞엣것으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뒤엣것으로 넘어갑니다. 그 경계가 언제 넘어갔는지는 본인도 모르기 때문에, 메모가 그걸 대신 알려주는 겁니다.

12년을 그렇게 지낸 건 그분 잘못이 아닙니다

그 자리가 12년 동안 안 바뀐 겁니다.

9WAY가 조직에서 몰입을 볼 때 쓰는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의미·방식·소속·인정·성취·성장인데, 몰입은 이걸 다 더한 값이 아니라 제일 낮은 하나가 정합니다. 다섯이 괜찮아도 하나가 크게 훼손돼 있으면 거기에 묶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가 몇 년째 그대로면, 사람은 대개 그걸 바꾸는 대신 안 느끼는 쪽을 택합니다. 그게 더 싸게 먹히니까요.

그래서 메모에 반복해서 올라오는 항목을 보시면, 그게 여섯 가지 중 무엇인지 대개 짚입니다. 계속 "이 일 왜 하는지 모르겠다"가 나오면 의미 쪽이고, "내 얘기가 안 다뤄진다"가 나오면 소속 쪽입니다. 무엇이 나를 멈추게 하는지 장면으로 적어두는 일이 중요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회사 일이 별로 안 걸리게 된 적 있으시다면

그거 성격이 좋아진 게 아니라 그 자리가 너무 오래 그대로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번 주에 하나만 적어두세요. 그걸로 뭘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 달 뒤에 그 메모가 알려줄 겁니다. 아직 바꿀 게 남았는지, 아니면 언제 나갈지를 생각해볼 때인지요. 당장 나가라는 신호가 아니라, 언제 나갈지 아는 눈금입니다.

12년은 어쩔 수 없었어도 여러분 자리는 아직 바뀔 수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도 유독 오래 걸리는 지점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인정이 없으면 먼저 꺼지고, 어떤 사람은 방식이 막히면 먼저 꺼지죠. 내가 어디에서 먼저 꺼지는 사람인지 궁금하시면 9WAY 강점 진단이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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