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자리에서 참으면 왜 말이 안 나올까 — 참기 대신 멈추기

억울한 자리에서 참으면 왜 말이 안 나올까 — 참기 대신 멈추기

면접을 보다가 울어서 면접관에게 혼났다는 글을 봤습니다. 5년 차 직장인이고, 다음 주에 면접이 하나 더 잡혀 있는데 그날 멘탈을 잡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그날 있었던 일을 순서대로 보면, 눈물은 제일 마지막입니다. 먼저 무너진 게 따로 있습니다.

그날 무너진 순서

글에 적힌 순서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면접관 한 명이 이력서를 넘기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습니다. 답변을 하면 말을 끊고, 인상을 썼습니다. 그러다 물었습니다. "본인이 한 업무 맞아요?" 조금 뒤에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정도 경력으로 연봉을 그만큼 받고 싶다고요?" 희망 연봉은 회사가 물어봐서 말한 건데도요.

여기서 억울함이 확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참았습니다.

그다음이 이렇습니다. 질문을 받아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얘졌고, 말이 계속 꼬였고, 마지막에 눈물이 났습니다.

순서가 보이시죠. 참았고, 하얘졌고, 꼬였고, 그다음이 눈물입니다. 그러니까 이날 먼저 무너진 건 감정이 아니라 말이었습니다.

참는 데도 값이 듭니다

왜 이 순서일까요. 감정을 겉으로 누르는 일에도 머리를 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값을 하필 생각하는 힘에서 꺼내 씁니다.

이걸 실험으로 보여준 연구가 있습니다. 심리학자 제인 리처즈와 제임스 그로스는 사람들에게 감정이 올라오는 영상과 사진을 보여주면서, 한쪽에는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누르라고 하고 다른 쪽에는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그다음 그 자리에서 오간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확인했습니다.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실린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누른 쪽이 세부 내용을 훨씬 못 기억했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이 연구는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눠서 비교했는데, 겉으로 누르는 방식만 기억을 깎았고, 상황을 다시 보는 방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같은 감정을 다루는데 방법에 따라 값이 다르게 든 겁니다.

이걸 면접장에 놓고 보면 이렇게 됩니다. 표정을 관리하면서 동시에 답을 만들려면 머리가 두 가지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제일 필요한 건 듣고 답하는 쪽이죠. 그러니까 억울한 자리에서 이를 악물고 참는 건, 그 자리에서 제일 필요한 힘을 제일 먼저 써버리는 일입니다. 프로답게 참으려다 답을 못 하게 되는 겁니다.

집에 가는 길에 할 말이 생각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말주변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는 참는 데 힘을 다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리를 벗어나 누를 일이 없어지니까 그제야 머리가 돌아오는 거죠.

참기의 반대는 터뜨리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오해가 하나 생기기 쉽습니다. 참지 말라고 하면 그럼 울거나 화를 내라는 얘기냐고 되묻게 되죠. 아닙니다.

참기와 터뜨리기 사이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멈추기입니다.

셋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 참기 — 감정을 숨기면서 계속 답합니다. 숨기는 데 힘을 쓰니까 답할 힘이 줄어듭니다.
  • 터뜨리기 — 감정을 그대로 내보냅니다. 힘은 안 뺏기는데 그 자리에서 잃는 게 많습니다.
  • 멈추기 — 답을 잠깐 세웁니다. 숨기지 않으니 힘을 안 뺏기고, 내보내지도 않으니 잃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는 대신 이 한 문장을 쓰시면 됩니다.

"잠시만요, 생각 좀 정리하고 답변드릴게요."

길어야 3초입니다. 그런데 그 3초가 말을 살립니다.

상황별 멈춤 문장

면접만 그런 게 아닙니다. 회의에서 갑자기 지적받을 때,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화상회의에서 다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에 맞는 걸 하나만 골라 외워두시면 됩니다.

상황 그 자리에서 쓰는 멈춤 문장
면접에서 공격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잠시만요, 생각 좀 정리하고 답변드리겠습니다."
면접에서 사실과 다른 전제로 물을 때 "그 부분은 정확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잠깐만 정리하겠습니다."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지적받았을 때 "짚어주신 부분 확인하고 답변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회의에서 준비 안 된 걸 물어볼 때 "지금 바로 답변드리면 부정확할 것 같습니다. 오늘 안에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상사가 책임을 물을 때 "상황을 순서대로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잠깐만 정리하겠습니다."
억울한 평가를 들었을 때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잠시만요."
화상회의에서 감정이 올라올 때 "죄송합니다, 소리가 잠깐 끊긴 것 같아서요.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고객이 강하게 항의할 때 "정확히 확인하고 답변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시간 주시겠어요?"
말이 이미 꼬이기 시작했을 때 "제가 지금 말이 좀 꼬였는데, 처음부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저히 그 자리에 있기 어려울 때 "물 한 잔만 마시고 오겠습니다. 1분이면 됩니다."

문장들이 다 비슷합니다. 공통점은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좀 당황스러워서요" 같은 말은 상대에게 내 상태를 설명하는 일이라 그 자체로 또 힘이 듭니다. 그냥 답을 잠깐 세우겠다는 말만 하시면 됩니다.

멈춘 3초에 할 일 한 가지

멈추는 것까지는 했는데 3초 동안 머리가 그대로 하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할 게 하나 있으면 훨씬 낫습니다.

질문을 그대로 되뇌어 보세요. 속으로 "이 사람이 지금 뭘 물어본 거지"만 한 번 되짚는 겁니다.

이게 도움이 되는 이유는 아까 연구가 나눠 보여준 두 방식 중 뒤쪽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눌러 없애려는 게 아니라, 이 상황이 무엇인지 다시 보는 쪽이니까요. 억울한 자리에서는 상대의 태도가 크게 들리고 질문 내용은 작게 들립니다. 질문만 다시 떠올리면 시야가 태도에서 내용으로 옮겨가고, 그 사이에 답이 돌아옵니다.

덧붙이면 답할 내용이 정말 없을 때는 이렇게 이어가시면 됩니다. "그 부분은 제가 지금 정확히 답변드리기 어렵습니다. 대신 ○○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른다고 인정하고 아는 쪽으로 옮기는 건 면접에서 감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꼬인 말을 계속 이어가는 쪽이 손해입니다.

멈추면 무례해 보일까 걱정되신다면

가장 많이 걱정하는 지점일 겁니다. 몇 가지만 짚겠습니다.

앞말이 있으면 무례하지 않습니다. 그냥 침묵하는 것과 "잠시만요"라고 말하고 침묵하는 건 완전히 다르게 들립니다. 앞말 하나가 그 침묵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바꿔줍니다.

신중해 보이는 쪽에 가깝습니다.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답이 튀어나오는 것보다, 한 박자 두고 답이 정리되어 나오는 쪽이 대체로 낫게 들립니다.

다만 매번 쓰면 안 됩니다. 모든 질문에 잠시만요를 붙이면 준비가 안 된 사람처럼 보입니다. 감정이 올라온 그 순간에만 쓰시면 됩니다. 하루에 한두 번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멈춤 문장으로 안 되는 자리도 있습니다. 위 글의 면접관처럼 처음부터 사람을 몰아붙이는 게 목적인 자리라면, 이 문장으로 그 자리를 좋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목적이 달라집니다. 그 자리를 살리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 목적이 되죠. 말이 꼬인 채로 30분을 보내고 나오는 것과, 할 말은 하고 나오는 것은 그날 이후가 다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그런 면접은 정보이기도 합니다. 지원자를 그렇게 대하는 조직이 입사한 사람은 다르게 대할 이유가 별로 없으니까요.

참지 말고, 멈추세요

글을 쓴 분은 다음 주에 면접이 하나 더 있다고 했습니다. 멘탈을 잡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요.

저는 이분이 그날 멘탈이 약해서 무너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울어서 무너진 게 아니라 너무 오래 참아서 무너진 겁니다. 5년을 그렇게 참아왔다고 쓰셨으니, 오히려 오래 버틴 쪽에 가깝죠.

그러니까 다음 자리에서는 잘 참으라는 말 대신 이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참지 말고 멈추세요. 감정은 참아서 지나가는 게 아니라 잠깐 멈춰서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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