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했는데 자꾸 설득당한다면, 말주변 문제가 아닙니다

거절했는데 자꾸 설득당한다면, 말주변 문제가 아닙니다

이유를 잘 댈수록 거절이 더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거절했는데 상대가 그 이유를 하나씩 반박하고, 어느새 내가 설득당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그런가" 싶어집니다.

말주변 문제가 아닙니다. 구조 문제입니다.

이런 글을 봤습니다. 회사 대표가 자기 조카를 소개해주겠다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분은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 그대로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온 말이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닌데 그게 뭐 대수냐, 가볍게 한번 만나보라"였습니다.

댓글에는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이미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솔직했는데도 안 통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진짜 문제는 솔직하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이유를 말하는 순간, 그 이유가 심사 대상이 됩니다

사람들이 거절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날 좀 어려울 것 같아서요."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요." "요즘 일이 많아서요."

이유를 말하면 상대는 그 이유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기 기준에서 가벼우면 거부합니다.

  • "그게 뭐 대수냐."
  • "그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
  • "그 정도는 괜찮지 않아?"

회식도, 주말에 오는 연락도, 갑자기 떨어지는 부탁도 전부 이렇게 굴러갑니다. 이유를 내놓는 순간 그 이유의 무게를 상대가 다시 잽니다. 그리고 힘이 있는 쪽이 재면 대체로 가볍게 나옵니다.

여기서 알아둘 게 있습니다. 이유는 방패가 아니라 협상 테이블입니다. 이유를 잘 댈수록 협상이 길어집니다. 상대는 그 이유를 없애는 방법을 찾으면 되니까요. 바쁘다고 하면 일정을 조정해주겠다고 하고, 멀다고 하면 태워주겠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결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정했습니다. 마음 써주신 건 감사합니다."

이 문장에는 심사할 대상이 없습니다. 이유가 없으니 반박할 것도 없습니다. 이미 정해진 것을 알린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협상이 시작되고, 두 번째는 협상할 게 없습니다. 이 차이가 전부입니다.

무례한 것도 아닙니다. 무례한 건 상대를 깎는 것이고, 이건 나에 대한 결정입니다. 오히려 이유를 길게 대는 쪽이 상대에게 "그럼 이 이유만 해결하면 되겠네"라는 여지를 줍니다. 그 여지가 서로를 더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대로 쓰실 수 있는 문장들입니다

핵심은 세 부분입니다. ① 결정을 알린다 ② 이유를 붙이지 않는다 ③ 상대의 마음은 따로 받는다.

상황 이유형 (협상이 시작됨) 결정형 (협상할 게 없음)
회식 "그날 좀 일이 있어서요" "저는 이번 회식은 빠지기로 했습니다. 자리 잘 보내세요."
주말 연락 "주말엔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주말에는 업무 연락을 안 받기로 정해두었습니다. 월요일 오전에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부탁 "제가 지금 일이 많아서요" "이번 건은 제가 맡지 않는 걸로 하겠습니다. 담당은 ○○님이 맞을 것 같습니다."
소개팅·사적 자리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요" "저는 지금은 그런 자리를 안 갖기로 정했습니다. 생각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단톡방·모임 초대 "제가 시간이 잘 안 맞아서요" "저는 이번엔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퇴근 후 술자리 "내일 일찍 나와야 해서요" "저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사적인 돈 부탁 "제가 요즘 여유가 없어서요" "돈 관련해서는 안 하기로 정해두었습니다. 어렵게 꺼내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반복되는 야근 요청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오늘은 정시에 나가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관심 없는 제안 "제가 잘 몰라서요" "저는 이번엔 안 하는 쪽으로 정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른쪽 문장들의 공통점이 보이실 겁니다. "~해서요"가 없습니다. 대신 "~하기로 했습니다"가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감사를 붙입니다. 이 감사가 관계를 지켜줍니다.

다만 모든 걸 결정형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예외가 있습니다.

결정권이 나에게 있는 일이라면 결정형이 맞습니다. 내 시간, 내 사생활, 내 관계. 이건 내가 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결정이 상대에게 영향을 주는 일이라면 협상의 여지를 두어야 합니다. 업무 분담, 일정 조율, 팀이 함께 지는 책임. 여기서 "저는 안 하기로 했습니다"만 던지면 그건 거절이 아니라 통보가 됩니다.

이럴 때는 결정형과 대안을 같이 씁니다.

  • "이번 건은 제가 다 맡기는 어렵습니다. A 부분까지는 하겠습니다."
  • "이 일정으로는 못 맞춥니다. 목요일까지면 가능합니다."
  • "이번 달은 어렵습니다. 다음 달 첫 주부터면 제가 맡겠습니다."

앞은 결정이고 뒤는 여지입니다. 이 조합이면 상대도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결정형으로 말했는데도 계속 밀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는 같은 문장을 그대로 한 번 더 말하면 됩니다. 새 이유를 만들어내면 다시 협상이 시작되니까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저는 이번엔 안 하겠습니다." 이 문장을 두 번째로 들으면 대부분 멈춥니다.

정리하면

  • 거절이 안 먹히는 건 말주변이 아니라, 이유를 대는 순간 그 이유가 심사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 이유는 방패가 아니라 협상 테이블입니다. 이유를 잘 댈수록 협상이 길어집니다
  • 결정형으로 말하면 심사할 대상이 없습니다. "저는 ~하기로 정했습니다. 마음 써주신 건 감사합니다."
  • 결정권이 나에게 있는 일은 결정형, 상대에게 영향을 주는 일은 결정 + 대안
  • 계속 밀고 들어오면 새 이유를 만들지 말고 같은 문장을 한 번 더 말합니다

거절은 설득하는 게 아니라 알리는 것입니다. 설득하려고 이유를 늘릴수록 상대에게 반박할 재료를 더 주게 됩니다.

무엇을 맡고 무엇을 안 맡을지 정하는 기준이 흐릿하면 거절도 매번 어려워집니다. 내가 어떤 일에서 힘이 나는 사람인지부터 정리해두면 그 기준이 선명해집니다. 9WAY 강점 진단을 참고해보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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