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자꾸 나한테 몰릴 때 — 정해진 일과 흘러온 일을 나누는 법

일이 자꾸 나한테 몰릴 때 — 정해진 일과 흘러온 일을 나누는 법

매일 야근하는 팀에서 해결책이라고 나온 게 팀을 아예 둘로 갈라버리자는 얘기였습니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차장이 자리를 자주 비우고, 그날 남은 일은 남은 사람들이 메우고, 그게 몇 달 쌓이니까 사정이 비슷한 사람끼리 팀을 짜자는 말까지 나온 겁니다.

이 글을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이 사람이 지나치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이 정도로 지치려면 일이 얼마나 몰렸을까 싶었고, 동시에 이상했습니다. 팀을 갈라도 그 안에서 또 누군가는 일찍 가고 누군가는 남을 텐데, 왜 이 해결책이 나왔을까요.

화는 왜 하필 옆자리로 갈까요

회사에서 배려는 대개 위에서 정합니다. 누구를 봐주자, 사정이 있으니 이해하자, 이런 건 결정권이 있는 사람이 정하죠. 그런데 그 배려의 뒷감당은 옆으로 흐릅니다. 결정은 세로로 내려오는데 비용은 가로로 퍼지는 겁니다.

여기서 두 가지가 동시에 벌어집니다. 정한 사람 눈에는 뒷감당이 안 보입니다. 자기가 결정한 건 배려까지고, 그 배려가 누구의 저녁 시간으로 메워지는지는 보고에 안 올라오니까요. 반대로 뒷감당하는 사람 눈에는 정한 사람이 안 보입니다. 눈앞에 있는 건 자리를 비우는 동료뿐이고요.

그러니까 화가 손이 닿는 데로 갑니다. 바로 옆자리로요. 이건 그 사람이 못돼서가 아니라 구조가 그렇게 생겼습니다.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멀리 있고,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가까이 있으니까요.

문제는 여기서 손해가 한 번 더 난다는 겁니다. 옆자리를 미워하면 마음은 잠깐 풀리는데, 상황은 하나도 안 바뀝니다. 미움을 받은 쪽도 자기가 무슨 일을 만들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래서 팀을 나누자는 결론까지 갑니다. 사람을 떼어놓으면 될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나눠도 그 안에서 똑같은 일이 생깁니다. 결정과 비용이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는 건 그대로거든요.

정해진 일과 흘러온 일

여기서 하나 나눠야 합니다. 사람이 못 견디는 건 일의 양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그 일이 나한테 온 방식입니다.

정해진 일은 누군가 정해서 나한테 온 일입니다. 무거워도 견딥니다. 무겁다고 말할 상대가 있고, 조건을 조정할 여지도 있고, 무엇보다 내가 그걸 하고 있다는 걸 누군가는 알고 있으니까요.

흘러온 일은 아무도 정한 적 없이 나한테 와 있는 일입니다. 가벼워도 못 견딥니다. 얘기할 상대가 없고, 조정할 근거도 없고, 심지어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무도 모르니까요.

퇴근길에 문득 내가 왜 이것까지 하고 있지 싶은 날, 그날 서러운 건 대개 일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 일을 나한테 준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준 사람이 없으니 고맙다고 할 사람도 없고, 힘들다고 말할 사람도 없죠.

그리고 이게 왜 중요하냐면, 해야 할 일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일이 많은 게 문제라고 보면 답은 줄이기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직장인은 그걸 스스로 못 줄입니다. 반면 일이 온 방식이 문제라고 보면 답은 정하기가 됩니다. 이건 오늘 할 수 있습니다.

흘러온 일은 왜 유독 특정한 사람에게 몰릴까요

흘러온 일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티가 안 납니다.

경제학자 린다 밥콕과 동료들은 이런 일을 승진에 도움이 안 되는 일(non-promotable tasks)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American Economic Review에 실린 연구에서 이 팀은 조직 안에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이 상당량 있고, 이 일들은 정식 배분이 아니라 요청으로 굴러간다는 걸 실험으로 보여줬습니다. 자리를 채우는 일, 대신 정리해주는 일, 남의 펑크를 메우는 일 같은 것들이죠. 이 연구에서는 같은 조건에서 여성이 이런 요청을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수락한다는 결과도 함께 나왔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건 성별보다 경로입니다. 이런 일은 명령으로 오지 않고 부탁으로 옵니다. 부탁으로 오니까 거절이 곧 관계 문제가 되고, 한 번 받으면 다음에도 그 사람에게 갑니다. 그렇게 두세 번 반복되면 그건 이제 아무도 정하지 않았는데 내 일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 잘하고 성격 좋은 사람에게 유독 많이 몰립니다. 능력이 있어서 몰리는 게 아니라, 부탁했을 때 거절 안 할 것 같은 사람에게 몰리는 겁니다. 억울한 얘기지만 구조를 알면 대응할 수 있습니다.

흘러온 일을 정해진 일로 바꾸는 한마디

그래서 일이 자꾸 나한테 몰린다 싶으면 먼저 이걸 나눕니다.

이 일, 누가 정해서 온 건가. 아니면 그냥 흘러온 건가.

  • 정해진 일이면 — 얘기할 상대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조건을 말합니다. "이걸 하려면 저건 다음 주로 미뤄야 합니다" 같은 식으로요.
  • 흘러온 일이면 — 아직 아무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때 옆자리에 말하면 안 됩니다. 옆자리는 이걸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정하는 사람에게 갑니다.

정하는 사람에게 가서 할 말은 딱 하나입니다.

"제 업무 범위를 한번 정리하고 싶은데요. 이거 제가 계속 맡는 걸로 정해진 건가요?"

이 문장이 하는 일은 거절이 아닙니다. 흘러온 일을 정해진 일로 바꾸는 겁니다. 답이 "네"로 와도 괜찮습니다. 정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조건을 말할 수 있고, 내가 하는 일이 최소한 보이지 않는 일로 남지는 않으니까요.

상황에 따라 문장이 조금씩 다릅니다. 자기 상황에 가까운 걸 그대로 쓰시면 됩니다.

상황 정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
몇 달째 남의 펑크를 메우고 있을 때 "○○님 자리 비울 때 그 일이 저한테 오는데, 이게 제 업무로 정해진 건지 그때그때 넘어오는 건지 정리하고 싶습니다."
부탁으로 시작한 일이 고정됐을 때 "처음에 한 번만 도와드리기로 한 건데 지금 매주 하고 있어서요. 계속 제가 맡는 게 맞을까요?"
새 일이 또 들어올 때 "받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A, B가 있어서요. 셋 중에 뭘 뒤로 미룰지 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팀 전체에 일이 몰릴 때 "이번 달에 팀으로 들어온 일이 평소보다 많은데, 우선순위를 한 번 정리하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 없는 일을 계속 할 때 "이 일이 제 업무 목록에는 없는데 시간이 꽤 들어갑니다. 목록에 넣어야 할지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동료의 사정을 배려하는 중일 때 "○○님 사정은 저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동안 그 일이 어디로 가는지는 정해두면 좋겠습니다."
이미 화가 많이 쌓였을 때 "지금 상황을 불평하려는 게 아니라 정리를 하고 싶어서 말씀드립니다. 제가 맡는 범위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상사가 바빠서 붙잡기 어려울 때 (메일·메신저로) "제 업무 범위 확인 건으로 10분만 시간 주실 수 있을까요? 항목은 세 가지입니다."

문장이 다 비슷해 보이신다면 맞습니다. 핵심은 하나거든요. 불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불만은 상대를 방어하게 만들고, 정해달라는 요청은 상대에게 할 일을 줍니다. 사람은 방어할 때보다 할 일이 생겼을 때 훨씬 잘 움직입니다.

말해도 안 바뀌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말을 했는데도 안 바뀌는 조직이 있습니다. 정하는 사람이 정할 생각이 없거나, 정할 힘이 없거나, 그냥 다 알면서도 굴리는 곳이요.

그렇더라도 이 한마디는 값을 합니다. 세 가지가 남거든요.

첫째, 기록이 남습니다. 메일이나 메신저로 물어봤다면 내가 이 일을 언제부터 어떤 양으로 하고 있었는지가 남습니다. 평가 시즌이나 이직 면접에서 내 일을 설명할 때 이게 재료가 됩니다.

둘째, 판단할 정보가 생깁니다. 물어봤는데도 아무것도 안 정해준다면, 그건 이 조직이 나를 어떻게 쓰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입니다. 참으면서 추측할 때보다 훨씬 정확한 정보죠. 남을지 나갈지를 그때는 사실 위에서 정할 수 있습니다.

셋째, 화의 주소가 바뀝니다. 이게 제일 큽니다. 옆자리를 미워하던 에너지가 구조를 확인하는 쪽으로 옮겨가면, 최소한 같이 일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안 망가집니다. 나중에 그 동료가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일 수도 있고요.

물론 정하는 사람에게 가는 게 늘 안전한 건 아닙니다. 말 꺼내는 것 자체가 위험 신호로 읽히는 조직도 있으니까요. 그런 곳이라면 문장을 요청 형태로 낮추고, 한 번에 하나만 물어보시면 됩니다. 여러 개를 한꺼번에 올리면 불만 제기로 들립니다.

정해지고 나야 조정이 됩니다

일이 몰려서 힘든 날, 제일 먼저 할 건 일을 줄이는 게 아닙니다. 그건 대부분 내 권한 밖이니까요.

먼저 나누세요. 이 일이 정해져서 온 건지, 그냥 흘러온 건지. 흘러온 거라면 미워할 사람을 찾는 대신 정하는 사람을 찾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한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이거 제가 계속 맡는 걸로 정해진 건가요.

이 질문 하나가 흘러온 일을 정해진 일로 바꿉니다. 그리고 정해지고 나야 그때부터 조정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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